앙가우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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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가우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4년 9월 17일부터 10월 22일까지 팔라우 제도 앙가우르 섬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앙가우르는 펠렐리우에서 11km 떨어진 작은 섬으로, 일본군은 1,400명의 병력을 배치하여 방어했다. 미군은 81보병사단을 투입하여 앙가우르 섬에 상륙, 일본군의 깊이 방어 전략에 맞서 격전을 벌였다. 전투 결과 미군이 섬을 점령했지만,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연합군 사상자가 일본군보다 많았다. 앙가우르 섬은 이후 비행장 건설을 통해 필리핀 전역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미군 제81보병사단은 이 전투를 통해 펠렐리우 전투에 투입되어 전투 경험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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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 중 팔라우 - 펠렐리우 전투
펠렐리우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병대와 육군이 필리핀 탈환 작전의 일환으로 팔라우 제도 펠렐리우 섬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로,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과 새로운 방어 전술,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미군에게 큰 어려움과 막대한 사상자를 안겨주며 전략적 가치에 비해 과도한 희생을 치렀다는 논란이 있다. - 팔라우에서 벌어진 전쟁 - 펠렐리우 전투
펠렐리우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병대와 육군이 필리핀 탈환 작전의 일환으로 팔라우 제도 펠렐리우 섬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로,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과 새로운 방어 전술,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미군에게 큰 어려움과 막대한 사상자를 안겨주며 전략적 가치에 비해 과도한 희생을 치렀다는 논란이 있다.
| 앙가우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전투명 | 앙가우르 전투 |
| 관련 전쟁 | 태평양 전쟁 |
| 일부 | 마리아나·팔라우 제도 전역 |
![]() | |
| 날짜 | 1944년 9월 17일 - 1944년 10월 22일 (1개월 5일) |
| 장소 | 팔라우 앙가우르 섬 |
| 결과 | 미국 승리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미국 지휘관 | Paul J. Mueller |
| 일본 지휘관 | 후토 우시오 이노우에 사다에 |
| 부대 규모 | |
| 미국 | 10,000명 |
| 미국 부대 | 제81보병사단 제321보병연대 제322보병연대 UDT 8 |
| 일본 | 1,400명 |
| 일본 부대 | 제14보병사단 제59보병연대 |
| 사상자 및 손실 | |
| 미국 사상자 | 전사 264명, 부상 1,354명 |
| 일본 사상자 | 전사 1,350명, 포로 50명 |
| 기타 정보 | |
2. 배경
앙가우르는 펠렐리우에서 약 11.27km 떨어진, 길이가 약 4.83km인 작은 산호섬으로, 인산염이 채굴되는 곳이다.[1] 1944년 중반, 일본군은 이 섬에 1,4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마셜 군도 함락 이후, 팔라우 제도는 방어가 취약했고 비행장을 건설할 수 있다는 잠재력 때문에 미국에게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상륙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하여 팔라우 작전은 마리아나 제도를 확보할 때까지 불가능했다.
2. 1. 일본군 전력
1944년 중반, 일본군은 팔라우 지역 사령관 이노우에 사다에 중장의 지휘 아래, 앙가우르에 고토 우시오 소령이 직접 지휘하는 1,4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1] 이들은 만주에서 4년간 전투 경험이 있는 제14보병사단 소속 정예병으로, 도조 히데키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직접 팔라우 방어를 위해 파견했다. 앙가우르 주둔 병력은 제59보병연대 제1대대였다.[1]앙가우르 지구대 병력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직책 | 성명 | 비고 |
|---|---|---|
| 앙가우르 지구대장 겸 보병 제59연대 제1대대장 | 고토 우시오 소좌 | |
| 육군 | ||
| 보병 제59연대 제1대대 본부 부관 | 스즈키 츠네 중위, 스즈키 야스히코 중위, 에구치 시게토 중위, 우사미 토시오 중위 | |
| 군의 | 가토 타케오 대위, 고바야시 켄 대위 | |
| 주계 | 가모시다 요시마츠 중위 | |
| 제1중대장 | 이시하라 마사요시 중위 | |
| 제1중대 소대장 | 이자와 켄 소위, 가메다 구마타로 소위, 누마오 사이지로 소위, 오사와 타츠오 소위 | |
| 제2중대장 | 사토 미츠요시 중위 | |
| 제2중대 소대장 | 오키 큐 소위, 사토 젠타로 소위, 미야시타 요시오 소위, 오카베 모리오 소위, 타테노 나오요시 준위 | |
| 제3중대장 | 시마 타케시 중위 | |
| 제3중대 소대장 | 야노 테루미 소위, 와카이 노부오 소위, 이야노 구니조 소위, 아사다 토요오 소위 | |
| 제1보병포 중대장 | 히노 세이이치 중위 | |
| 제1보병포 중대 소대장 | 나카지마 마사미 중위, 고바야시 요네 소위 | |
| 포병 제2중대장 | 시바자키 쇼조 중위 | |
| 고사 기관포대 | 가시와바라 겐고 소위, 다카하시 미노루 소위 | |
| 공병 제1소대장 | 호시노 젠지로 소위 | |
| 통신 소대장 | 야마네 소이치 소위 | |
| 보급 소대장 | 타치하라 야스오 소위 | |
| 위생 소대장 | 노자와 후타치 소위 | |
| 제14사단 야전 병원 | 사이토 겐타로 중위 | |
| 제14 경리 근무부 | 오카다 히로요시 중위 | |
| 제3 선박 수송 사령부 팔라우 지부 | ||
| 해군 | ||
| 제45 경비대 앙가우르 전탐소 소장 | 이시쿠라 요시타로 병조장 | |
2. 2. 미군 전력
펠렐리우 전투가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제322 연대 전투단(RCT)은 북쪽 해변인 레드 해변에, 제321 RCT는 동쪽 해변인 블루 해변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두 부대는 모두 81보병사단 소속으로, 폴 J. 뮬러 소장이 지휘했다.[1]3. 전투 경과
1944년 9월 11일, 전함 테네시, 4척의 순양함, 그리고 항공모함 와스프에서 발진한 40대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에 의한 포격이 시작되었다.[1] 9월 17일, 두 개의 연대 전투단(RCT)이 북동부와 남동부 해안에 상륙했다.[1] 일본군 고토 우시오는 모든 해변을 방어할 병력이 부족했기에, 가장 상륙하기 좋은 해변(미군에게는 그린 비치)에 벙커, 블록하우스, 참호, 대전차 참호 등으로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미국 육군 폴 J. 뮬러는 그린 비치 주변의 증강을 보고, 방어가 덜 된 레드 비치와 블루 비치에 병력을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제322 RCT는 산발적인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받았지만, 비교적 저항 없이 상륙했다. 블루 비치에 상륙한 제321 RCT는 더 강력한 사격을 받았지만, 최소한의 피해로 상륙했다.
당시 일본군의 새로운 "깊이 방어 전략"은 미군이 저항 없이 상륙하여 내륙으로 이동하면, 내륙 깊숙이 방어선을 구축하여 미군이 교두보에 밀집되었을 때 야간에 대규모 반격을 가해 바다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타라와 전투, 과달카날 전역, 사이판 전투에서처럼 자살적인 반자이 돌격은 금지되었다. 두 RCT 모두 밤에 반격을 받았지만, 이는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을 뿐이었다. 9월 18일 늦게, 두 RCT는 연결되어 각자의 목표를 향해 진격했다.
9월 19일, 섬은 반으로 갈렸고, 두 개의 저항 거점이 생겼다. 주요 일본군은 라몰도 언덕 북서쪽에, 다른 하나는 그린 비치 방어 요새에 있었다. 이틀간의 격렬한 전투 후, 제321 RCT는 그린 비치 방어선을 돌파하고 후방에서 측면 공격을 가하여 400명의 병사를 제압했다. 3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섬의 남쪽 절반이 확보되었다. 제321 RCT가 남쪽에서 교전하는 동안, 제322 RCT는 섬 서쪽 해안으로 이동하여 유일한 거주 지역인 "사이판 타운"을 확보하고 "신사 언덕"과 라몰도 언덕으로 북진했다. 그곳에는 750명의 주력이 섬의 가장 강력하고 어려운 지형에 자리 잡고 있었다.
3. 1. 일본군의 저항과 미군의 진격
1944년 9월 17일, 미 육군 제81보병사단은 섬의 북동쪽 및 남서쪽 해안에 상륙했다. 미군은 상륙 초기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지만, 상륙 지점 두 곳에서 전진하여 같은 날 저녁 내륙으로 진출했다. 앙가우르 지구대장 고토 우시오 소좌는 수비대 잔존병을 재편성하고 야습을 감행하여, 다음날 새벽 미군을 한때 해안 가까이까지 밀어냈다. 그러나 날이 밝자 미군은 M4 중전차와 LVT를 앞세우고 함재기에 의한 폭격을 더하여 반격했고, 오전 10시경 일본군 공격 부대는 전멸했다.[1]9월 19일 이른 아침, 미군은 섬의 중심부 '사이판 마을'에 돌입하여 곧 점령했다. 펠렐리우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앙가우르 섬의 일본군 수비대는 팔라우의 다른 섬으로부터 증원이나 보급을 받을 수 없었고,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인해 9월 25일에는 목표로 했던 언덕을 점령, 9월 30일에는 섬을 완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1]
일본군은 섬 동부의 동굴호에 숨어 저항을 계속했지만, 10월 19일에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여 옥쇄했다. 고토 대대장 이하 수비대원 대부분이 전사했으며, 섬은 잿더미가 되었다.[2][1]
3. 2. 펠렐리우 전투의 영향
펠렐리우 전투는 앙가우르 전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앙가우르 섬 남쪽을 확보한 후, 9월 23일 미국 육군 제321연대 전투단(RCT)은 막대한 사상자로 전투 능력을 잃어가던 제1 해병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펠렐리우로 파견되었다.[1] 앙가우르에 남은 제322 RCT는 섬 북서쪽 라몰도 언덕의 일본군 방어 거점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다.라몰도 언덕 전투는 펠렐리우 섬 움부르브로골 포켓에서 벌어진 전투의 축소판이었다. 일본군은 산호 바위에 동굴, 벙커, 참호를 구축하여 끈질기게 저항했다.[1] 미군은 "더 볼"로 알려진 고지에서 맹렬한 기관총, 박격포, 저격수 사격에 발이 묶였다. 9월 25일, 미군은 큰 피해를 입고 "더 볼"에 침투했지만, 일본군은 동굴 입구를 봉쇄당할 때까지 저항을 계속했다.[1]
앙가우르 전투는 연합군 사상자가 일본군보다 많은 몇 안 되는 전투 중 하나였다. 제322 RCT는 앙가우르에서 미군 사상자의 80%를 차지했으며, 47%의 사상률을 기록했다. 펠렐리우에서 제81보병사단의 다른 부대원 282명이 전사하고 4,409명이 부상당했다.[1]
3. 3. 일본군의 옥쇄
1944년 9월 11일, 미군은 와스프에서 발진한 돈틀리스 폭격기와 테네시 전함의 함포 사격으로 앙가우르 섬을 공격했다.[1] 이 공격으로 섬 내 일본군 통신 시설이 파괴되어 팔라우 주둔 일본군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후 일본군 보병 제59연대 제1대대는 지휘부 명령 없이 전투를 수행, 옥쇄했다.1944년 9월 17일, 미 육군 제81보병사단이 앙가우르 섬 북동쪽과 남서쪽 해안에 상륙했다. 일본군 지뢰와 수제 작전으로 미군에 일부 피해가 발생했지만, 상륙 지점 두 곳에서 내륙으로 진격했다.
앙가우르 지구대장 고토 우시오 소좌는 남은 병력을 재편성, 가용 화력을 총동원해 1944년 9월 18일 새벽 야습을 감행, 미군을 해안 근처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나 날이 밝자 미군은 M4 중전차와 LVT를 앞세우고 함재기 폭격까지 더해 반격, 오전 10시경 일본군 공격 부대를 전멸시켰다.
1944년 9월 19일, 미군은 섬 중심부 사이판 마을을 점령했다. 펠렐리우 전투로 인해 앙가우르 섬 일본군 수비대는 팔라우 다른 섬으로부터 증원 및 보급을 받지 못했고, 병력 차이가 컸다. 1944년 9월 25일 미군은 목표였던 언덕을 점령했고, 1944년 9월 30일 섬을 완전히 점령했다.
앙가우르 섬 수비대는 섬 동부 동굴호에 은신, 저항을 이어갔지만 1944년 10월 19일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여 옥쇄했다. 고토 대대장을 포함한 수비대원 대부분이 전사했고, 섬은 초토화되었다. 일본 육군 수뇌부는 앙가우르 수비대의 공적을 기려 1944년 10월 28일 쇼와 천황의 어가상 말씀을 내렸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앙가우르 전투는 팔라우 제도 작전의 일부였지만, 작전 시작이 늦어지면서 1944년 10월에 시작된 필리핀 전역을 지원하기 위한 비행장 건설이 지연되었다. 윌리엄 F. 할시 주니어 장군은 이 작전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군사학자들도 제81보병사단이 얻은 전투 경험이 주요 이점이라는 데 동의했다.[3]
미군 점령 후, 앙가우르 섬에는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1944년 10월, 미국 육군 항공군 제494폭격대 (B-24 편성)가 도착하여 코레히도르 섬을 포함한 필리핀과 팔라우 제도의 코로르, 얍, 트루크 등에 여러 차례 폭격을 가했다. 이 폭격대는 1945년 5월까지 앙가우르 섬에서 활동했다.
앙가우르 섬은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미국군 항공대의 공수 항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4. 1. 앙가우르 전투의 교훈
앙가우르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도 비행장이 건설되었지만, 팔라우 작전의 시작이 지연되면서 비행장은 1944년 10월에 시작된 필리핀 전역을 제때 지원할 준비가 되지 못했다.[1] 윌리엄 F. 할시 주니어 제독은 팔라우 침공 전에 이 작전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군사 역사가들도 이에 동의하며, 주요 이점은 제81보병사단이 얻은 전투 경험이라고 언급했다.전투 중에 시비들은 494 폭격기 그룹, 제7공군의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를 수용할 활주로를 건설했는데, 이들은 필리핀과 다른 팔라우 섬에 대한 잦은 폭격을 가했다.[1]
제81보병사단은 팔라우 섬 중앙 고지에서 극심한 저항에 직면한 제1해병사단을 돕기 위해 직접 펠렐리우 전투로 이동했다. 그들은 섬을 점령하고 남은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해 한 달 더 펠렐리우에 머물렀다.
참조
[1]
서적
Peleliu 1944
Osprey Publishing Ltd.
2002
[2]
웹사이트
The HyperWar website
http://www.ibiblio.o[...]
[3]
서적
Peleliu 1944
Osprey Publishing Ltd.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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